명나라의 군사력은 어떻게 붕괴되었나?
댓글
0
조회
1
07.02 18:39

16세기 중반, 1.5억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명제국 제2의 도시 남경에 67명의 왜구가 나타났다.
남경을 방어하는 12만의 주둔군 앞에 선 67명의 왜구는 수 개월에 걸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만들고 무수한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남경을 함락시킬 뻔한 뒤에야 토벌되었다.
당연하게도 종이 위에 적힌 12만의 대군은 현실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장부상 병력의 10%만을 실소유한 지역이 보편적이었고, 심하면 3%의 병력을 가진 지역도 자주 발견된다.
대체 왜 명의 군사력은 이 꼴이 되었을까?
명나라를 건국한 홍무제 주원장이 만들어두었던 위소제란 한마디로 둔전병이다.
각각의 병사는 생계수단으로 토지를 받고, 토지의 산출에 더해 나라로부터 약간의 식량을 추가로 지급받아 생활한다.
그런데 이런 둔전제도의 근본적인 한계는 정복을 통해 토지의 총량을 늘릴 수 있는 건국 초기에만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확장한도에 닿으면 정복이 멈추고 토지 증가가 끝나는데, 땅이 안 늘어나도 사람들은 계속 아기를 낳는다.
토지에 비해서 인구가 너무 많아지면 각 병사들에게 지급 되는 토지가 줄어들고, 결국 둔전으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해지며 붕괴된다.
도입 당시에는 몽골로 인해 황폐해진 화북 지방을 복구하면서 군사력도 챙기는 훌륭한 정책이었으나, 화북의 개간이 끝나며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토지가 규정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에도 위소제는 15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었는데, 황제들이 막대한 양의 지폐를 찍어낸 뒤 병사들에게 하사하여 생계를 보조하였기 때문이다.
한 해에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지폐만 해도 무려 명의 1년치 세입의 2.5배에 해당되는 양이었다.
당연하게도 시장에 한국프로야구게임GOAT 풀린 지폐는 곧 종이쪼가리로 변했고 지폐와 함께 명의 군사력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위소제의 둔전병은 자급자족을 목표로 설계되었으나 자급자족은 불가능해졌고, 지폐를 잃어버린 정부는 우선 병사들에게 배급되는 식량을 줄여 적자를 해결했다.
무기는 병사의 사비로 구입해야 하였고 만약 기병의 말이나 해군의 배가 상한다면 손실분은 병사들의 임금으로 보충해야 했으며, 손실액은 미리 월급에서 공제되었다.
또한 식량의 배급은 번번이 중단되었고, 중단된 식량 배급을 대신해 병사들에게 지급된 급료는 악화(惡貨)로, 명목상의 가치에 비해 실제 통용되는 가격이 형편없었다.
실상 둔전병들은 일반 농민의 10배에 달하는 세금을 납부하는 셈이었고 그 자식의 자식까지 영원토록 의무가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탈영이 급증했고 정부는 연좌제를 도입하여 탈영을 막으려 했지만 원인 해결 없이 결과만 틀어막는 식의 정책이 효과를 볼 리가 없었다.
결국 후방은 장부의 10%, 전방 군사기지는 40%의 병력을 유지하는 선에서 균형이 맞춰졌다.
명의 건국 당시 주원장은 둔전병의 자급자족과 교초의 가치 유지를 기본 전제로 두고 토지세를 아주 낮게 설정했다.
국방비가 0원인데 굳이 백성들을 쥐어짤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실로 훌륭한 유교적 애민정책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위소제는 붕괴되었고, 높은 세금을 내리기는 쉽지만 그 반대는 대단히 어렵다.
그리하여 후대 황제들은 16세기에 접어들며 증가한 북방의 군사적 위협을 무너진 위소제와 낮은 세율로 막아내야 했다.
이제 와서 위소제를 폐지하고 군제를 처음부터 새로 만들고 낮은 세율을 인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학자란 마땅히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고 옛 성현의 말씀을 따라야 하거늘, 어떤 참람한 유학자가 감히 초대 황제께서 친히 만든 제도를 뒤엎고 백성들의 세율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딜레마 속에서 16세기의 황제들은 장강 이남의 군사력을 포기하고, 수도 방위군을 비참한 지경으로 만들고, 북방 변경군에게 예산을 몰아주는 선택과 집중을 결정한다.
황제와 조정을 따라서 지방의 기득권들도 선택과 집중의 예를 따랐다.
자신들의 부유함을 선택하고 피지배계층에게 납세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명은 세율은 낮지만 세금의 분배는 불공평한 국가였다.
부호들이 토지의 일부와 함께 그 토지 전체에 부과된 납세 의무를 빈민들에게 저렴하게 판매하면 부호들은 영구적인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 것이다.
명의 지방 통치에 필수적인 향촌 엘리트-기득권-토호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세금 부담을 적극적으로 빈민에게 전가했다.
물론 정부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토호의 협조가 없으면 지방을 통치할 수 없는 국가에서 토호들을 제지할 방법은 없었다.
이른바 향신이라 불리는 이들은 이렇게 얻은 부를 통해 자신들의 지역에서 배출된 중앙 관료들을 후원해주기도 하였다.
유교 이념에 충실한 초저세율 국가 명나라는 관료들의 검약을 강조해 생활이 불가능할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였고, 이들의 '후원'이 없는 관료들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국방비도 공무원 줄 월급도 없는 정부가 지역마다 지방관을 잔뜩 파견할 수 있을리가 없다.
몇 안 되는 숫자의 지방관들은 생전 처음으로 가 본 낯선 지역에서 아주 방대한 규모의 행정단위를 통치해야 했다.
당연히 지방관들이 행하는 행정의 대부분은 대대로 그 지역에서 영향력을 닦아온 향신들이 실무를 맡아 처리된다.
그리고 토호 없이는 행정이 불가능한 지방관이 쌀숭이... 토호들의 사소한 세금 전가 행위를 문제삼을 방법이 존재할리가 없다.
오직 중앙에서 실시하는 전국적 토지조사만이 문제의 해법이었으나, 이런 경우에는 향신이 오랜 시간 중앙 관료와 쌓아온 "후원관계"가 빛을 발한다.
장거정이 야심차게 수행한 토지조사 프로젝트는 장거정의 죽음과 후원관계를 통해 성공적으로 좌초되었다.
토지조사로 무거운 세금을 매겨 블쌍한 백성들의 삶을 망가뜨린 장거정을 격렬히 비난하는 대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력제는 지방관들에게 토지조사 결과를 '수정'하라고 명령하였고 향신들은 만족하였다.
상황이 이렇기에 정부는 매우 낮은 토지세율에도 불구하고 토지세를 올린다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열 명이 나누어 낸다면 고작 2%의 세율이지만, 한 명이 몰아서 낸다면 20%가 된다.
이미 토호들에게 산출의 절반을 바치는 소작농에게 20%의 세금을 내라고 한다면 그 소작농에게 남은 선택지가 무엇일지는 자명하다.
참고로 향신들도 정식으로 과거 응시하는 유학자들이라 고통받는 백성들의 부담을 늘리지 말라는 '유교적인' 상소문을 자주 올린다.
결국 낮은 명목세율에도 불구하고 세율 인상은 한정적이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주원장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가 하나 더 나타났으니, 바로 화약의 등장이다.
대포의 등장은 포병이라는 병과와 그 포병을 양성하고 대포를 만들 전문인력을 같이 낳았다.
칼과 창이라는 알기 쉽고 간단한 무기를 사용하던 시절보다 군대는 더 고도화되었고 더 많은 예산을 필요로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명 정부는 토지세율을 올리고 어떻게든 돈을 짜내어 북부를 해결하였으나 이제는 남부가 문제다.
해적보다는 유목민이 무서웠던 명 정부는 북부 변경군에 자원을 몰아넣고 남부의 군사제도가 붕괴되는것을 감수하기로 결정했다.
자연스럽게 남부에서는 왜구가 창궐하였고 이걸 막아낼 중앙정부의 예산은 이미 북부에 쏟아부어진 뒤였다.
당연히 완전히 무너진 남부의 위소제로는 왜구를 막아낼 수 없었다.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남부의 관리들은 각종 잡세를 만들어 내었다.
주세, 지붕세, 소금세, 도축세, 통행세, 식초세 등이 신설되어 지방 정부의 예산을 채운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로컬 세금은 중앙정부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지방 관리들이 군자금을 '창의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왜구가 사라진 뒤에도 지방관들은 자신들의 창의적 활동을 지원하는 잡세를 폐지하지 않았다.
로컬 세금을 통해 만들어진 재정은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위소제를 대체하기 위해 모병제를 택했다.
그리고 임금을 받고 고용되는 모병제 병사들은 국가가 아닌 고용주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 용병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이들은 지역 방위에는 꽤나 능력을 발휘했으나 각 장군과 지역에 귀속되어 있다는 특성상 국가 전체를 위한 장기적, 거시적 캠페인에는 동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난점에도 불구하고 16세기의 명은 나름대로 성공적인 군사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척계광의 군사개혁과 장거정의 재정개혁, 독보적인 국가 자체 체급 등을 통해서 남부의 왜구를 막아내었고, 북방 유목민을 방어했고, 무엇보다도 만력 삼대정 또한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사실 아무리 나라 꼬라지가 처참해도 중국 통일제국이 분열된 유목민이나 해적, 남만 반란군 따위에게 망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장거정의 개혁이란 근본적인 체제의 변화보다는 긴축정책을 통해 일시적으로 자금을 만들어낸 것이었고, 만력 삼대정으로 이 자금은 고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7세기에는 소빙하기가 중국의 농민들을 덮치며 가뜩이나 처참한 명의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된다.
그리고 마침내 해적들을 상대로 생사결을 펼치던 중국의 통일제국 명은 새로운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
얼어붙은 북부에서 여진을 통합하고, 몽골을 복속시키고, 조선을 짓밟은, 후금의 등장이다.
참고문헌: Military Expenditures in Sixteenth Century Ming China, ray huang